Historical Site
旌門.旌忠閣 (정문,정충각)
慕 賢 祠 (모현사);初懸板 延諡閣(초현판,연시각)
題 名 錄 (제명록), 邀仙亭(요선정)
題名錄(제명록)
二公先生行蹟 (이공선생행적)
貞節公 漁溪 趙旅先生(정절공 어계조여선생)
桃村公 李 秀亨先生 (도촌공 이수형선생)
雉 岳 山 題 名 錄 序
(치 악 산 제 명 록 서 )
元公觀瀾首之次者 趙公 漁溪 次者 李公 桃村, 而姓名之
(원공관란수지차자 조공 어계 차자 이공 도촌, 이성명지)
下各以別號標之下方題以景泰 年三月旣望立石云,而年上缺
(하각이별호표지 하방제이경태 연삼월기망입석운, 이년상결)
一字訥翁李公光庭之 定以爲六臣就死 之際末知何所考也,
(일자눌옹이공광정지 정이위육신취사 지제지말하소고야,)
然以此爲據則七年丙子矣, 夫石之爲 物終古不其立者又挺然
(연이차위거칙칠년병자의, 부석지위 물종고불륵기입자우정연)
不伏三君子題名必於是不以 他人間之其亦有取於石歟雉卽
(불복삼군자제명필어시불이 타인간지기역유취어석여치즉)
石歟雉卽原州 鎭山而原固 元公所 居之鄕也, 方其携手登臨
(원주 진산이원고원공소 거지향야, 방기휴수등임)
籍草 鼎坐酉山逸詩可知中 流楚 辭可詠也, 撫其跡而 想其
(적초 정좌유산일시가지중 유초 사가영야, 무기적이 상기,)
心有不傷心 隕涕乎,噫自當時 觀之鐵 其券而金 櫃者 輝煌震
( 심유불상심 운체호희자당시 관지철 기권이금 궤자 휘황진)
耀 何山阿片 石而霜降水落百年論定人之麻?而咨嗟者在此而
(요 하산아편 석이상강수락 백년논정 인지마사이자차 자 재차이)
不在彼矣余按 端宗初年癸酉元公以 集賢殿直提學 謝病歸又
(불재피의의여안 단종초년계유원공이 집현전직제학 사병귀우)
四年而六臣死
(사년이육신사)
山 在 原 州 參 判 睦 萬 中 撰
(산 재 원 주 참 판 목 만 중 찬)
치악산에있는 제명록에는 원공이 맨처음이요 그 다음이 조려 어계공 그다음이 이수형 도촌공이다 성명아래에 각기별호를 표시하고 아래쪽에는 경태년에 치악산 입석에 쓰다라고 하였는데 년자위에 한자가 빠저있다 눌옹 이광정공은 육신이 죽게될 무렵이라고 단언하니 무엇을 상고하여 그렇게단정한것인지 알수없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한다면 이치악산 제명록은 경태7년병자가 된다. 대저 돌이라는 것은 오래가도 깍여지지 않고 흩어지지도않는것이며 그 서있는 모습이 우뚝하여 굽히지 않으니 세군자의 이름을 돌에 새긴것도 이때문 이리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사이에 넣지않은 것 역시 돌에 연유하여 취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치악산은 바로 원주고을의 진산이요 원주는 원래 원공이 살던 지방이다. 옛날 세군자가 생존시에 손을 잡고 올라가서 풀을 자리삼아 둘러앉으면 서산의 남긴 시를 서로 화답 할수 있었을 것이고 또 중류의 초사를 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자취를 어루만지며 세군자의 심정을 헤아려 생각한다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아아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공훈을 철권에 적어 금으로 궤를만들어 직할만큼 휘황하게 빛나는 것이어늘어찌산모퉁이의 한조각 돌에 비길것이랴. 그러나 서리내리고 비떨어지는 동안 백년이 지난후에 옳은 의논이 결정되니 사람들이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탄하는 것은 여기에 있고 딴데 있는것이아니다. 내가 삼가 살펴 보건데 단종 초에 원공이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다가 병을 구실삼아 사면하고 돌아갔으며 또 4년만에 육신이 죽은 것이다.참판 목만중 지음
邀 仙 亭 (요선정)
題名錄(제명록)
觀 瀾 亭, 碑閣 (관란정,비각)
文學詩碑 (문학시비)
-생육신관란원호선생 문학시비-
본시비는 한국문학비건립 동호회주관하에 종친회 후원과 원주시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서기 1997년6.14일 건립되었다.
“ 간밤에 우던여울 슬피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보내도다 저물이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울어 보내도다
-청구영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