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al Site
貞簡公 觀瀾 墓碣 (정간공 관란 묘갈)
忠臣集賢殿直提學觀瀾先生之墓碣銘
(충신집현전직제학관란선생지묘갈명)
昔在 端宗初(元) 光廟威德日盛集賢殿直提學元公謝病歸鄕里與世相絶及端廟(端宗)遜于寧越
(석재 단종초(원) 광묘위덕일성집현전직제학원공사병귀향이여세상절급 단묘(단종)손우영월)
就越之西築室名以觀瀾或臨流嘯(詠)或閉戶著書晨夕瞻望涕泣以寓戀 君之乙亥 端宗運訖
(취월지서축실명이관난혹임유소영(영)혹폐호저서신석첨망체읍이우연 군지침을해 단종운흘)
服方喪三年制畢復歸原州舊廬不出戶庭人莫得見其面其侄子判書原城君孝然屛徒御踵門請見
(복방상삼연제필복귀원주구여불출호정인막득견기면기질자판서원성군효연병도어종문청견)
堅拒不許 光廟特除戶曹參議召之以死自誓不應命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焉蓋以 莊陵在舊居
(견거불허 광묘특제호조참의소지이사자서불응명좌필동향와필동수이종언개이 장능재구거)
之東也 始端宗降號 魯山君 今上朝陞封大君至戊寅冬追復位號爲 端宗大王陞享于 廟封寢
(지동야 시단종강호 노산군 금상조승봉대군지무인동추복위호위 단종대왕승향우 조묘봉침)
園爲 陵時錫鼎實膺摠理使監董封 陵事白于 上請 褒尙其時節義人於是公則旌其閭金時習
(원위 능시석정실응총이사감동봉 능사백우 상청 포상기시절의인어시공칙정기여김시습)
追 贈臺憲嚴興道 贈官配享于六臣祠因鄕儒疏請享公於耘谷書院又以公及李孟專趙旅金
(추 증대헌엄흥도 증관배향우육신사인향유소청제향공어운곡서원우이공급이맹전조여김)
時習成聃壽南孝溫諸公建祠于嶺南之咸安竝享焉曠世哀榮至此而殆無憾矣公諱昊元氏爲原州
(시습성담수남효온제공건사우영남지함안병향언광세애영지차이태무감의공휘호원씨위원주)
著姓(高祖諱弘弼仕高麗官門下侍中)曾祖諱廣明宗簿寺令祖諱方甫 贈吏曹參議考諱憲 贈兵
(저성(고조휘홍필사고여관문하시중)증조휘광명종부사영조휘방보 증이조참의고휘헌 증병)
曹參判元氏高麗國子進士天常之女非一元也公詞藝早成擢永樂癸卯文科文學聲望大爲一時
(조참판비원씨고여국자진사천상지여비일원야공사예조성탁영낙계묘문과문학성망대위일시)
友所推重歷敭淸顯 文宗朝官至集賢殿直提學其後公之孫叔康以史官直筆被禍公遂取平生
(제우소추중역양청현 문종조관지집현전직제학기후공지손숙강이사관직필피화공수취평생)
著述及疏章盡焚之且戒(其)諸子勿復讀書求名利以故家無隻字遺藏年代且邈官歷生卒事行始
(저술급소장진분지차계(기)제자물복독서구명이이고가무척자유장연대차형막관역생졸사행시)
終無傳焉噫當革除之際事有至難言苟非明識特操超然於利害禍福之道夫孰能高擧遠引歸潔其
(종무전언희당혁제지제사유지난언구비명식특조초연어이해화복지도부숙능고거원인귀결기)
身以盡自靖自獻之義也哉若先生見幾勇退旣得大雅之明哲精忠大節尤爲百代臣人之軌則而致
(신이진자정자헌지의야재약선생견기용퇴기득대아지명철정충대절우위백대신인지궤칙이치)
命遂志又泯然無跡與成謹甫諸公異塗而同歸後之篤論者曰悅卿今之伯夷六臣今之方練又曰烟
(명수지우민연무적여성근보제공이도이동귀후지독논자왈열경금지백이육신금지방연우왈연)
村霧巷比六臣較高嗚呼此可以尙論古人矣霧巷卽公所居煙村卽崔直學德之云易曰明夷利艱貞
(촌무항비육신교고오호차가이상논고인의무항즉공소거연촌즉최직학덕지운이왈명이이간정)
內難以能正其志箕子以之余以爲(耳學)元公以箕子爲心者也公娶寧越辛氏保勝郞將乙賢之女
(내난이능정기지기자이지여절이위(이학)원공이기자위심자야공취영월신씨보승낭장을현지여)
生四男一女男長孝行生員次孝廉文科弘文館校理次孝乾進士次孝坤進士女適吳致宗墓在原州
(생사남일여남장효행생원차효염문과홍문관교이차효건진사차효곤진사여적오치종묘재원주)
南十里南松夫人同岡而異墳舊無碑表今將石樹諸經後孫松齡草公遺事來請銘銘
(남십리남송부인동강이이분구무비표금장참석수제경후손송령초공유사래청명명 )
曰 人臣事君 盡節爲忠, 死生殊軌 其心直同, 卓卓先生 生際不淑, 天位有歸 故主殞覆, 明燭
(왈 인신사군 진절위충, 사생수궤 기심직동, 탁탁선생 생제불숙, 천위유귀 고주운복, 명촉)
幾先 決焉遐征, 屛居鄕里 脫榮名, 越山之西爰來結屋, 坐臥必東 若星拱北, 天地崩淪 我守
(기선 결언하정, 병거향리 탈사영명, 월산지서원래결옥, 좌와필동 약성공북, 천지붕윤 아수)
基貞, 身服方喪 跡不戶庭, 不事二君 矢死罔僕,嗟六子 我心曲, 聖上在宥 邦禮式昭,新
(기정, 신복방상 적불호정, 불사이군 시사망복,의차육자 병아심곡, 성상재유 방예식소,신제)
端廟 列于宗, 洗雪積寃 神人胥悅, 乃眷先生旌褒棹, 贈享之典 延梅嚴, 百世之下 有聳
(단묘 열우종조, 세설적원 신인서열, 내권선생정포도결, 증향지전 연계매엄, 백세지하 유용)
觀瞻, 舊闕墓碑 載營載刻, 節彼稚嶽 維水激激,是邇莊陵 遺魄所依, 靈神 擁佑無違, 公有
(관첨, 구궐묘비 재영재각, 절피치악 유수격격,시이장릉 유백소의, 영신힐향 옹우무위, 공유)
雲仍 圭薦黍稷, 作爲銘詩 風玆千億.
(운잉 규천서직, 작위명시 풍자천억).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崔錫鼎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최석정찬)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趙相愚書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조상우서)
崇禎紀元再 癸巳 十二月 日立
(숭정기원재 계사 십이월 일입)
貞簡公觀瀾墓碣飜譯文 (정간공 관란 묘갈번역문)
충신 집현전직제학 관란선생 묘갈명 옛날 단종초 원년에 세조에 위엄과 덕망이 점점 성해가니 집현전직제학 원공이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과 떨어져서 살았다. 그리고 단종이 영월로 물러나게 되자 영월 서쪽으로 가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관란정이라하였다. 때로는 물가에 나가 휘파람 불고 시를 읊었고 때로는 문닫고 들어 앉아 글을 지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정자에 올라 멀리 영월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며 어린 임금을 그리워 하였다.
을해년(1455년 세조 원년)단종이 승하하자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3년상을 치르고 상기가 끝나자 다시 원주 옛집으로 돌아가서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장조카인 원성군 효연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맨발로 문밖에 꿇어앉아 뵙기를 간청하였지만 구지 거절하고 들이지 아니하였다. 세조께서는 특별히 호조참의를 제수하고 불러들였지만 죽기를 맹세하고 왕명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며 앉으면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누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어 한 평생을 마치니 이는 장릉(단종의 능)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 단종의 칭호를 강등하여 노산군으로 하였는데 지금의(숙종조) 이르러 대군으로 올려서 봉하였으며 무인년(숙종24년 1698년) 겨울에 다시 위호를 단종대왕으로 하고 종묘에 올려 봉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묘소도 릉으로하였다. 이때 최석정이 총리사에 임명되어 능을 봉하는 일을 총괄 감독하였는데 위에 상소하여 당시의 절의의 인물들을 포상하게 하였다.이때에 공에게는 사당을 짓고 향사하여 포상하였고 김시습은 사헌부 관원으로 추증하였으며 엄흥도에게도 추증하여 육신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지방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공을 운곡 서원에 높여 모시고 또 공과 이맹전, 조려, 김시습, 성담수, 남효은을 영남 함안에 사당(서산서원)을 짓고 함께 모시게 하니 오랫동안 불평스럽던 일이 이때(숙종) 와서야 거의 유감없이 되었다. 공의 휘는 호요, 원씨이며 원주에서 널리 알려진 성이다. 고조부의 휘 홍필은 고려관문하시중이었으며, 증조부 휘 광명은 종부시령이었으며, 조부 휘 방부는 증이조참의이고 부친 휘 헌은 증병조참판익흥군이다.
어머니 원씨는 고려국자진사 천상의 딸이며 같은 원씨가 아니다. 공은 학문을 일찌기 성취하여 영락 계묘년(세종5년 142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학문이 높아 명성과 물망이 당시 친구들간에 추앙을 받았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서 문종조(1451∼1452)에는 벼슬이 집현전직제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후에 공의 손자인 숙강이 사관으로서 나라의 역사를 바른대로 썼다가 화를 입고 죽으니 공이 그만 평생 지은 글과 상소문등을 가져다 불태우고 또 여러 아들들에게 훈계하기를 다시는 글을 읽어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집에는 한 자의 기록도 남지 않게 되었다. 또한 연대가 오래되고 보니 벼슬경력과 탄생 서거하신 일의 시종(처음과 끝)이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아아 시세가 변혁될 때를 당하면 일에 관하여 말하기를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니 밝은 식견과 특별한 지조로 이해(이로움과 해로움), 화복(재앙과 복)의 길밖에 선 초연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높이 처신하고 멀리 떨어져서 한 몸을 깨끗이 하여 자신을 보전하고 선왕을 위하는 충성과 의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랴! 선생같은 분은 기밀을 미리 알고 용감하게 물러나니 큰 선비의 명철한 일을 실천한 것이며 정충의 큰 절개는 백대후 까지도 모든 신하된 사람들의 갈 길을 보여 준 것이다. 명을 바치고 뜻을 관철한 그밖의 일들이 묻혀서 남은 흔적은 없으나 상고 하건데 공이 걸은 길은 성근보(성삼문의 자)등 제공(당시의 뛰어난 분들:사육신)들과 달랐지만 그 충렬과 의리로 일관한 점은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후세에 와서 이 일에 대하여 신중하게 논평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열경(김시습의 자)은 현대의 있어서의 백이요, 육신은 현대의 방련(중국 명나라 초기 절의의 방효유와 연안)이라하고 또 말하기를 연촌과 무항은 육신에 비하여 그 충절이 더욱 높은 것이다"라고 하니 아아 가이 고인에 대한 마땅한 논평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무항은 관란공이 살던 곳이요, 연촌은 직제학 최덕지를 말하는 것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 명이(明夷 - 주역 64괘의 하나: 밝은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간난(어렵고 힘든 문제에 봉착)할 때 정(곧음)함이 이(이로움)하다. 아니 간난할 때 능히 그 뜻을 바로 하니 기자가 이대로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데 원공이야 말로 기자와 같은 뜻을 갖은 사람이었다. 원공은 영월 신씨 보승랑장(고려 정6품 무관직) 을현의 딸에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효행은 생원, 차남 효렴은 문과 홍문과 교리를 지냈고, 삼남 효건은 진사요, 사남 효곤도 진사였으며 딸은 오치종에게 출가하였다.산소는 원주 남쪽으로 10리 남송에 있는데 부인과 같은 산에 봉분만을 따로 모시었다.
예전에는 비석이 없었는데 지금 돌을 깎아 옆에 세우고 후손 송령이 공의 행적의 대강을 적어 가지고 와서 명문을 청함으로 다음과 같이 적는다.신하로서 임금을 섬겨 절개를 다함이 충성인데, 죽고사는 것은 다를 지언정 그 마음은 하나라네. 높고 높은 선생께선 맑지 못한 세상에 태어나니, 임금의 자리는 옮겨지고 옛 임금은 돌아가셨네. 다가올 일 미리 알고 단연코 멀리떠나, 고향에 숨어살며 영화명예 벗어버렸네. 산 너머 서쪽에다 한 칸 집을 새로 짓고,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듯이 자나깨나 동쪽만 향했었네. 하늘과 땅이 무너져도 나는 나의 길만 갈 것임을, 삼년 상복 치르고도 대문밖을 나오지 않았네. 두 임금 섬기지 않으니 죽은 들 하인될 수 있으리오, 아름다울 손 적 육신이여 그 마음 나와 같구나. 성상께서 용서하시니 나라의 예식을 밝혔도다, 단종묘 새로짓고 나라 사당에 모셨도다. 쌓인 원한 씻어내니 신도 사람도 다 함께 기뻐함이여, 선생님 살던 곳에 정충각이 높이 세워졌네. 증직향사 나라의 큰 은전 매암(중국의 바위 이름)에게도 미치었네. 백대가 지난 후에도 모두들 우러러 본 받아서, 옛집을 다시 짓고 묘비 새로 세우니, 높고높은 치악산에 물소리도 청량하여라. 장릉에서 멀지않으니 유혼이나마 의지할 곳 생기셨네. 신령도 감동하여 님의 혼령 돕고 보살피리. 후손들 끊임없이 임찾아 제사들이고, 비석에 글 새겨 천억만년 전하려네.
숭종기원 두 번째 계사년(숙종 39년, 서기 1713년) 12월 일세움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최석정지음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 조상의씀
旌 忠 閣 碑 文 (정충각비문)
忠臣觀瀾元先生旌忠碑
(충신관란원선생정충비)
五倫之有君臣天之經地之義而所謂民之大者也然而載籍以來身蒙大難有能知
(오륜지유군신천지경지지의이소위민이지대자야 연이재적이래신몽대난유능지)
其義盡其分者盖鮮矣而若集賢殿直提學元先生豈非扶樹天經地義之人耶在昔
(기의진기분자개선의 이약집현전직제학원선생기비부수천경지의지인야 재석 )
端宗光廟之際文學經術之士平時號賢士大夫一朝於禍福榮辱之分多喪其
(단종광묘지제문학경술지사평시호현사대부일조출어화복영욕지분다상기)
本然之天獨先生始以明哲處艱貞之世而不失其志終盡事一之忠而泯然與醉
(본연지천독선생시이명철처간정지세이불실기지종진사이지충이민연여취)
琴諸公異塗而同歸則其孤忠卓節之凜然燁猶可以想見於百載之下矣
(금제공이도이동귀측기고충탁절지름연위엽유가이상견어백재지하의)
嗚呼臺觀瀾東望方喪三年泣血盡哀土室東首終身不替堅拒新貴矢死
(오호축대관란동망허희방상삼년읍혈진애토실동수종신불체견거신귀시사)
不貳罔非先生自靖自獻之義而岡僕之節也蟄戶霧巷焚其平生所著述詩文蟄
(불이강비선생자정자헌지의이강복지절야칩호무항분기평생소저술시문칩)
戶霧巷焚其平生所著述詩文疏章戒子孫勿復讀書求名利而農匿跡尤其含
(호무항분기평생소저술시문소장계자손물복독서구명리이소농익적우기함)
寃痛憤迫不得己之情也 余嘗慕其節而悲其志適遊 到平原見棹楔之在山趾
(원통분박불득기지정야여상모기절이비기지적유도평원견도설지재산지)
而卽下馬而式訪其仍孫得明谷崔相公錫鼎所序碑銘而讀之盖先生節義之
(이즉하마이식방기잉손득명곡최상공석정소서비명이독지개선생절의지)
始終顯晦無不備載獨霧巷之閭闕揄揚之言而旌閭傾風雨不蔽余於斯益
(시종현회무불비재독무항지여궐유양지언이정여경비풍우불폐여어사익)
悲先生子孫之替也 先生諱昊觀瀾其號也霧巷卽先生名所 居村云觀瀾
(비선생자손지체야선생휘호관란기호야무항즉선생명소거촌운관란)
亭在 寧越府之西思乃坪霧巷在平原治南五里 程夫子顔樂亭 銘曰
(정재영월부지서사내평무항재평원치남오리정부자안락정명왈)
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正學其何可忘斯可以銘此閭矣先生之友崔直學
(수불인폐지불인황오호정학기하가망사가이명차여의선생지우최직학)
德之亦退居烟村以終云原之人士能知之乎余將誌之』
(덕지역퇴거연촌이종운원지인사능지지호여장지지
◎.平山后人 申 撰
(평산후인 신 협찬)
◎.全州后人 李日泳 書
(전주후인 이일영서)
◎.礪山后人 宋喆顯 銘
(여산후인 송철현명)
◎.原州市長 金龍雲 協讚
(원주시장 김용운 협찬)
◎.十五世孫 世玉〃
(십오세손 세옥〃)
◎.光復二十七年辛亥四月九日
(광복이십칠년신해사월구일)
◎.原州文化院長黃柱益主管
(원주문화원장황주 주관)
◎.十六世后孫 峻常〃
(십육세후손 준상 〃)
◎.民議員 金龍鎬 協讚
(민의원 김용호 협찬)
◎.十六世孫 徽常 〃
(십육세손 휘상 〃)
旌忠閣碑飜譯文(정충각비번역문)
충신관란선생정충비
오륜 중에 임금과 신하가 있는 것은 하늘의 법이요, 땅의 의로써 이른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의 큰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기록으로 실린 이후로 한 몸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능히 그 의리를 알고 그 본분을 다한 사람은 대개 드물다.
그런데 집현전직제학 원선생 같은 분은 어찌 하늘의 법과 땅의 의리를 굳건하게 이 세상에 심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예전 단종과 광묘때에 즈음하여 문학과 유가 경서에 관한 학문의 선비로서 평시에는 어진 사대부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화복과 영욕의 갈림길에서 몸을 움추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본래의 천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선생만은 처음부터 명철한 성품으로 간난을 참고 절개를 지켜야할 형편에 임하여 끝내 그 지조를 상실하지 않고 한 임금을 섬기는 충성을 다하였으며 숨어살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취금헌(박팽년의 아호)'등과 걸은 길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것이니 그 외로운 충성과 높고 빛나는 늠름한 절개는 백년후에까지도 기릴만한 일이다.
아아 관란공이 대를 쌓고 그 위에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고 삼년 북을 치를 동안에는 피눈물로 애통하고 움막에 거처할 제 동쪽으로 머리 두는 것을 평생토록 바꾸지 않았으며 새로운 영달을 굳게 물리치고 죽기를 맹세하고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그 어느 하나 선생이 조용히 몸 바쳐 다른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가 아닌 것이 없다.
무항에서 칩거하면서 평생 동안 지은 시문이나 소장(임금께 드리는 글) 등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다시는 글을 읽어 명예와 영달을 꾀하지 말고 농사에 힘쓰며 자취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였으니 더욱 그의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한 절박한 심정에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일찌기 그 절개를 사모하고 그 뜻을 슬퍼하여 왔는데 마침 유람차 원주에 왔다가 정문(정충각)이 산아래 있음을 보고 곧 말에서 내려서 그의 7대손을 찾아 명곡 최상공 석정이 쓴 비명의 서문을 읽어 볼 수 있었는데 대개 선생의 절의의 시종과 명암이 갖추어 실려지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무항에 있는 정문에 관해서는 찬양하는 말이 없고 또 정문 집이 기울고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리우지 못하니 내가 다시 한 번 선생의 자손들이 쇠잔함을 슬퍼하게 되었다.
선생의 휘는 호요, 관란은 그의 호이며 무항은 선생이 사시던 마을의 이름이라 한다. 관란정은 영월 서쪽 사내평에 있으며 무항은 원주읍 남쪽 5리에 있다. 정부자의 안락정 명문에 이르기를
" 물을 어찌 끊어지게 할 수 있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할 수 없거든 아하 바른 학문을 어찌 잊어버리게 할 수 것이랴!" 하였는데 이 글 구절이야 말로 바로 이 정문의 명문이 될만하다. 선생의 친구 직제학 최덕지가 역시 연촌으로 물러 나와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원주 인사들이 어찌 이를 알 것인가. 내가 장차 이것을 적으려 한다.
평산후인 신 협 찬
전주후인 이 일 영 서
여산후인 송 철 현 새김
서기 1971년 신해 4월 9일
원주문화원장 황 주 익 주관
16세 후손 준 상 주관
원주시장 김 용 운 협찬
민의원 김 용 호 협찬
15세 후손 세 옥 협찬
16세 후손 휘 상 협찬
觀瀾亭遺墟碑記 (관란정유허비기)
觀 瀾 亭 遺 墟 碑 記
(관란정유허비기)
嗚呼此古學士元先生觀瀾亭遺址也 先生以我 世宗四年登第歷事文宗官至
(오호차고학사원선생관란정유지야 선생이아 세종사년등제역사문종관지)
集賢殿直提學 端宗初服謝病歸原鄕逮 端宗遜于越之淸浦先生卽其江上流
(집현전직제학 단종초복사병귀원향체 단종손우월지청령포선생즉기강상류측)
築土爲臺因樹爲亭名以觀瀾逐日登臨望君所寓丹與夫人手灌園鋤圃取蔬果
(토위대인수위정명이관란축일등임망군소우단침여부인수관원서포취소과)
納空匏有時浮于江達于浦 端宗上賓先生就墓傍泣血居廬朝夕哭拜盡喪三年
(납공포유시부우강달우포 단종상빈선생취묘방읍혈거려조석곡배진상삼년)
乃歸原州之霧巷閉戶不見人面從子原城君孝然以光廟勳臣屛其騶徒踵門請
(내귀원주지무항폐호불견인이종자원성군효연이광묘훈신병기추도종문청)
見先生拒而不納 光廟特除戶曹參議矢死不起坐必東向臥必東首而終盖莊陵
(견선생거이불납 광묘특제호조참의시사불기좌필동향와필동수)이종개)
在東故也方先生之在亭也隣有婦爲人日往江干則先生常常先己爲出坐
(재동고야방선생지재정야인유리부(위인병벽일왕강간칙선생상상선기출좌)
亭上其女異之請聞其意先生泫然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吾之來此不忘
(정상기녀이지청문기의선생현연왈충신불사이군열녀불갱이부오지래차불망)
吾舊君故也其女聞而泣曰妾早齡失天獨居難行意將適人今聞先生之言身雖微
(오구군고야기녀문이읍왈첩조영실천독거난행의장적인금문선생지언신수미)
賤於心有戚戚焉遂終身守貞云雖愚夫愚婦聞先生節義莫不感激欽慕所謂頑懦
(천어심유척척언수종신수정운수우부우부문선생절의막불감격흠모소위완나)
可變者非耶嗚呼乙丙之際至艱之會也 先生先見幾於未然超然遠引旣得大
(가변자비야오호을병지제지간지회야 선생선견기어미연초연원인기득대)
雅之明哲未又盡節遂志以畢君臣之義其視六臣所謂殊塗而一致者也 然見幾於
(아지명철미우진절수지이필군신지의기시육신소위수도이일치자야 연견기어)
初猶可及也 盡節於終泯然無跡尤可爲難箕子之明夷利艱貞允爲協矣先生諱昊
(초유가급야 진절어종민연무적우가위난기자지명이리간정윤위협의선생휘호)
字子虛遭時不幸自焚其詩章著述隱晦其跡故事蹟無傳焉 肅廟戊寅追復莊陵褒當
(자자허조시불행자분기시장저술은회기적고사적무전언 숙묘무인추복장릉포당시)
時節義之士特旌先生閭又享于原州耘谷書院及咸安西山書院 正宗甲辰 贈謚曰
(시절의사사특정선생여우제향우원주운곡서원급함안서산서원 정종갑진 증익왈)
貞簡越之人慕先生之義不己就觀瀾亭遺墟願以表章而爲不泯其卓然之迹先生之
(정간월지인모선생지의불기취관란정유허원이표장이위불민기탁연지적선생지)
傍孫羽孫方守原州捐伐石方伯沈侍郞晋賢助成之走人請文於余余嘗高先生
(방손우손방수원주연름벌석방백심시랑진현조성지주인청문어여여상고선생)
之節而悲先生之志者久矣 書其本末系之以辭辭曰 『淸之水上有白雲如
(지절이비선생지지자구의 서기본말계지이사사왈『청령지수상유백운여 )
盖 有鳥有鳥啼何苦前有百鳥羅拜 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綿小 亭巖臨
(개 유조유조제하고전유백조라배 왕손유혜불귀 춘초생혜천면소 정암임)
水水流人去何年 水無盡兮名將傳』
(수수류인거하년 수무진혜명장전』)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
(숭록대부원임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홍)
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
(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
摠府都摠管 洪 良 浩 撰
(총부도총관 홍 양 호 찬)
觀瀾亭遺墟碑記飜譯 (관란정유허비기 번역)
관란정유허비기
아아 이곳은 옛날 학사 원선생의 관란정이 섰던 옛터이다. 선생은 우리 세종 4년(서기 142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종조에는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었으며 단종조초에는 병으로 사면하고 원주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후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물러아게 되자 선생도 그 강 상류로 가서 흙을 모아 대를 쌓고 나무로 정자를 지어 날마다 그 위에 올라가서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뫼시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밭에 물주고 김매어 채소 과일을 얻어서 빈 박통에 넣어서 수시로 강물에 띄워 청령포 로 보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선생은 묘소 곁으로 가서 여막을 짓고 피눈물을 흘리며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 으로 곡하며 절하고 3년상을 치른 다음 원주 무항으로 돌아가서 방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조카인 원성군 효연이 광묘(세조조)의 공신이었는데 하인들을 물리치고 문 앞에 서서 공을 뵙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들이지 않 았으며 광묘가 특히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다가 일생을 마치니 이는 장릉(단종묘)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일찌기 선생이 정자에 계실 때에 이웃에 과부가 있어 남의 빨래를 해 주노라. 날마다 강가에 가면 언제나 선생이 먼저 나와서 정자위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우리 옛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 여인이 이 말을 듣고 울며 말하기를" 제가 젊은 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혼자살며 지내기가 어려워서 앞으 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선생님 말씀을 들 니 미천한 마음 이 슬프고 미안합니다" 하고 그만 종신토록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어리석은 남녀라도 선생의 절의를 듣고는 감격하고 공경하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고하거나 나 약한 사람에게도 변하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아 을해, 병자년(단종 3년)은 지극히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데 선생은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그 기미를 알고 초연하 게 멀리 떠나갔으니 벌써 큰 선비의 명철함을 보였으며 나중에는 또 절개를 다하고 뜻을 이루어서 군신간의 의리를 다 하였으니 육신에게 비하여 이른바 길은 달라도 뜻은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에 기미를 알고 처신한 일에 관해서는 알 수 있으나 나중에 절개를 다하는 일은 기록 이 흩어져 자취가 없으니 알기가 어려운 일이다. 저 기자의 명이의 가르침이야 말로 여기에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선생의 휘는 호요 자는 자허이다.
불행한 때를 만나서 손수 그가 저술한 시와 글을 불사르고 자취를 숨겼기 때문에 사적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숙묘 24년 무인(서기 1698)에 장릉을 추후 복위하고 당시의 절의있는 선비들을 표창하였는데 특별히 선생의 집을 정표 하였으며 또, 원주의 운곡서원과 함안의 서산서원에 향사하였다. 그리고 정조 8년 갑진(1784년)에는 시호를 내리어 '정간'이라 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선생의 절의를 사모하는 마음 금할바 없어 관란정 유허에 표하고 글지어서 그 높은 자취가 깨지지 않게 하려는데 선생의 방손 우손이 그때 원주수령이 되어 재물을 준비하고 돌을 다듬어 감사 심진현이 찬조하여 이루고 사 람을 급히 보내어 내게 글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찌기 선생의 절개를 높이 추앙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여 온지 오랜 터이라 그전 말을 적고 가사를 뒤에 붙이는바이다.
" 청령포 물위에 흰구름 일산 같은데
큰 새 있어 슬피울고 그 앞에 온갖 새 날아들어 절하는구나
전에 놀던 그 왕손 한번 가고 소식없는데
봄풀만 해마다 나서 마냥 우거지어라
정자와 바위 물가에 섰는데 물 흐르고 사람간지 몇 해인가
저물이 끝없이 흐르듯 님의 이름 길이 전하리오. "
숭록대부원임,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 홍 양 호 지음
慕賢祠 神道碑 (모현사 신도비)
朝鮮忠臣觀瀾元先生神道碑
(조선충신관란원선생신도비)
嗟 惟我 端宗遜位之時 有忠憤慷慨之臣謀復上王殺身而成仁遁世而取
(차 유아 단종손위지시 유충분강개지신모복상왕살신이성인둔세이취)
義者 有之焉 先生姓元 諱昊號觀瀾原州人也 其先高麗朝文科諱益謙之
(의자 유지언 선생성원 휘호호관란원주인야 기선고려조문과휘익겸지)
後高祖諱弘弼門下侍中 曾祖諱廣明宗簿寺令祖諱 方甫贈吏曹參議考
(후고조휘홍필문하시중 증조휘광명종부사령조휘 방보증이조참의고)
諱憲贈兵曹判書也 先生 我 世宗癸卯登第官府尹文宗朝集賢殿直提學
(휘헌증병조판서야 선생 아 세종계묘등제관부윤문종조집현전직제학)
肅宗戊寅 褒賞其節義 己卯命旌閭 正祖六年贈吏曹判書 諡貞簡配貞
(숙종무인 포상기절의 기묘명정여 정조육년 증이조판서 시정간배정)
夫人 寧越辛氏保勝郞將乙賢之女 有子五人子孫之藩衍不盡記上王流
(부인 영월신씨보승랑장을현지여 유자오인 자손지번연불진기 상왕유)
配淸 浦時棄官還鄕築室武陵泛瓢於浦口己知上王安候時有村女將
(배청영포시기관환향축실무능범표어포구기지상왕안후시유촌여장)
欲改嫁之意 於江渚見先生而問之曰先生果何人常如是乎曰思舊
(욕개가지의 병벽어강저견선생이문지왈선생과하인상여시호왈사구)
君而然也曰豈無他君耶先生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女感其言
(군이연야왈기무타군야선생왈충신불사이군열여불갱이부여감기언)
終不改節焉與同志諸人登雉岳山題銘同心協力誓死輔國未幾承聞上
종불개절언여동지제인등치악산제명동심협력서사보국미기승문상
王之昇遐卽欲奔喪國禁森嚴未遂素志東望莊陵哭盡三年之際作夢遊
(왕지승하즉욕분상국금삼엄미수소지동망장능곡진삼연지제작몽유)
錄而述情懷精忠與日月幷燿大義與秋色爭高壯哉忠義孰不景仰配享
(녹이술정회정충여일월병요대의여추색쟁고장재충의숙불경앙배향)
于西山書院及七峰書院久矣崇禎後六癸酉嶺之人士詢謀於先生之胄
우서산서원급칠봉서원구의숭정후육계유영지인사순모어선생지주
孫通喩于士林欲伸所志奄遭庚寅之亂獻誠目錄諸般考證歸於灰燼運
(손통유우사림욕신소지엄조경인지난헌성목록제반고증귀어회신운)
也奈何天運循環無往而不復本面士林更起慕賢之議謹堅貞珉於先生
(야내하천운순환무왕이불복본면사림갱기모현지의근견정민어선생)
之遺墟事之成就有時而然耶先生之忠義復明於世而永垂無窮矣銘曰
(지유허사지성취유시이연야선생지충의복명어세이영수무궁의명왈)
壯哉貞簡 盡忠報國 時丁否運 能全其職
(장재정간 지눙보국 시정부운 능전기직)
納履東歸 遙望北宸 仰不愧天 俯不人
(납이동귀 요망북신 앙불괴천 부불작인)
淸山不老 流水洋洋 淸風高節 百世有光
(청산불노 유수양양 청풍고절 백세유광)
崇禎紀元 後六 己未 二月
숭정기원 후육 기미 이월
寧越鄕校 前典校 宋淳哲 謹記
慕賢祠 神道碑 飜譯文( 모현사 신도비 번역문)
조선충신관란원선생신도비
아 ! 우리 단종께서 임금의 자리를 내놓게 되었을때에 충의의 지절을 지키며 비분강개 한 신하들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 하다가 몸을 희생하여 충절을 이룬 사람도 있고 또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면서 지조를 지킨 사람도있다.
선생의 성은 원씨요, 휘는 호요, 호는 관란이며 본관은 원주이시다. 그선대는 고려조에 문과에 등제한 익겸의 후손이다. 고 휘 홍필은 문하시중이었고 증조 휘 광명은 종부시령이며 고조 휘 방보는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고 휘 헌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세종5년 계묘(1423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부윤을 지내고 문종때에는 벼슬이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숙종24년 무인 (1698년)에 그의절의를 포창하여 다음해 기묘에 나라의 명으로 정려를 세우고 정조6년 (1782년) 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간이라 시호를 내리었다.
부인은 영월신씨며 보승낭장인 을현의 따님으로 다섯아들이 있었으며 자손들은 수가 많아서 다기록하지 못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을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무릉에다 집을 짓고 살았다. 강가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워 보내어 단종의 안후를 알아내는 방법을 썼다 이때에 마을에 사는 어떤 여인이 재혼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선생을 보고서 묻되"선생은 어떤분이기에 여기서 늘 이렇게 지내느냐" 하니 선생은 "옛임금을 사모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낸다"하였다 여인이"다른임금이 계시는데 하필옛임금을 그렇게 그리워할 것이 무었이냐"하니 선생은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며 열녀는 두남편을 섬기지 않는다"하니 여인은 그말에 감동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키고 살았다.
선생은 뜻이 같은 여러사람들과 함께 치악산에 올라 가서 서로 힘을 모으고 뜻을 함께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에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는데 얼마 우에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곧 분상하고자 하였으나 관가의 제재가 매우 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쪽으로 장릉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3년을 마치는 즈음에 "몽유록"을 지어서 그의 감회를 서술하였다 선생의 정충은 일월과 같이 빛나고 대의는 가을 하늘보다 더높았으니 아 ! 장도하도다 이충절을 누가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오래동안 서산서원과 칭봉서원에서 제향을 받들어 왔는데 숭정후 6년 계유(1933년)에 강원도의 인사들이 선생의 자손들과 상의하여 다시 서원을 세우기로 하였으나 뜻밖에 경인지란(6.25전쟁)을 만나 기부금 목록과 기타 증빙 서류가 무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천도는 다시 순환하여 이면에 본 면 사림들의 선현을 추모하는 뜻을 다시 일으켜 선생의 유허에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일이 이루워지는 것은 때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가 선생의 충절이 다시 세상에 밝혀져 무궁한 세대에 길이 전하게 되리로다 명에 이르기를
"장하도다 정간공이여! 충정을 다바쳐나라에 보답하고
불행때을 마나서도 능히 그 직분을 다했도다
벼슬을 버리고 동으로 돌아가 멀임 계신 곳을 바라 보며 살았으니
하늘에도 사람에도 부끄러움 없는 그의 일생이었다
물도 출렁출렁 흘러 가는데 산은 옛날처럼 푸르고
맑은 바람 높은 절개 천백년 후에까지 빛나리라"
숭정기원후6년기미(1979) 2 월 일
전영월군 향교 교전 송순철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