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공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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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門.旌忠閣 (정문,정충각)

  • 서기 1,698년 肅宗24年 戊寅에 端宗의 位號를 復位하고 節槪를 지킨 忠臣들을 表彰하게 되었다.
  • 公께서도 判府事 崔錫鼎의 上訴로 이때 忠節을 表彰받게 되어 生家터에 旌門을 세우고 旌忠閣이 세워지게 되었다.
  • 서기 1,950년 6.25전쟁으로 파손되었는데 1,970년 原州文化院 주관하에 元氏門中 後援으로 再建되었다.
  • 旌忠閣懸板에는“忠臣觀瀾元先生旌忠之閣”(충신관란원선생정충지각)이라 했고 비각안에는 높이 2.2m 폭 52㎝의 오석으로 된 비석이 세워져 있고 앞면에는 “忠臣觀瀾元先 生旌忠碑”(충신관란원선생정충비)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공의 행적이 기록되었다.
  • 매년 원주원씨문중에서 祭享하고 있다.

所在;原州市 開運洞 328-18(霧巷洞) (소재;원주시 개운동(무항동))

慕 賢 祠 (모현사);初懸板 延諡閣(초현판,연시각)

  • 서기1457년 10월24일 端宗이 비참하게 昇遐 하시니 觀瀾公께서는 이곳에 土室을 짓고 서기1457년-1459년 10월까지 服喪3年을 마치셨다.
  • 서기1699년 肅宗25年 己卯年 判府事 崔錫鼎의 上訴로 寧越 水周面 土室에 廟祠(묘사)를 建立하고 延諡閣(연시각) 이란 懸板(현판)을 賜額(사액) 하였다.
  • 서기 1868년 高宗5년 戊辰年에 高宗의 甥姪(생질) 判書(판서) 沈相元 (심상원) 堤川에 왔다가 延諡閣(연시각) 참배차 來하여 忠臣의 祠堂이니 慕賢祠(모현사) 로 하라하고 親筆로 懸板까지 쓰고 걸은 것이 오늘날 까지 불리우고 있다.
  • 서기1979년 己未年 2月 영월 문화원 주관 門中後孫의 後援으로 神道碑(신도비)를 건립하고 寧越 鄕校前典校 宋淳哲 謹記하였다.
  • 매년 음력 3월3일 영월 유림이 주관하고 문중후원으로 모현제향을 올리고 있다.

[所在; 寧越郡 水周面 武陵 3里(土室) ](소재;영월군 수주면 무릉3리(토실)

陰3月3日祭享

題 名 錄 (제명록), 邀仙亭(요선정)

題名錄(제명록)

  • 世祖元年乙亥 1455년7월28일 端宗이 魯山君으로 降封되어 寧越땅 淸浦로 流配되시 니公께서 思乃坪에 정자를 짓고 端宗의 安慰를 祈願 하였는데 서기 1456년 여름 어느날 교분이 두터운 趙旅先生과 李秀亨先生 두분이 방문하여 時代를 恨歎하시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節義를 盟誓하시고 題名錄을 刻字하시었는데 元,趙,李三公은 자주 만나 단종의 안위를 근심하였다.
  • 서기1727년 英祖 3년에 餘窩(여와)睦萬中(목만중)先生이 參判時節 雉岳山 題名錄書 敍述하였다.
  • 서기1987년 도로확장공사로 제명록이 파괴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여기에 復元하였다. (寧越忠節顯彰會주관하에 三公門中의 後援으로 복원함)

「 所在;寧越郡 水周面 武陵3里(武陵谷)」

二公先生行蹟 (이공선생행적)

貞節公 漁溪 趙旅先生(정절공 어계조여선생)

  • 字는 英甫요,號는 桃村, 羽溪인이다.
  • 世宗朝때 蔭仕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할때 그의 나이 21세로 울분을 못이겨 署令의 벼슬을 내리고 향의 順興땅에 隱居하였다.
  • 거실을 지었는데 삼면은 벽이고 오직 북쪽은 곧영월단종 능침이 있는 곳으로 창문을 두었으며, 창을 향해 앉으면 반드시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 元,趙,두분과 함께 치악산 아래 성수를 기원하는 제명을 하였으며 일편단심 절의로 94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두문불출하였다

桃村公 李 秀亨先生 (도촌공 이수형선생)

  • 字는 主翁이요, 號는 漁溪,咸安(함안)인이다.
  • 단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太學에서 수학하였는데 수양대군의 찬위에 憤慨 하직하고 院北洞에 隱居하였다.
  •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니 자주 문후를 드리기 위해 영월땅에 와서 관란선생과 이수형선생 을 만나 치악산아래서 안위를 기원하면서 바위에 제명을 했는데 참판 목만중 선생이 서문을 지어 三公의 절의를 讚揚하였다.
  • 正祖朝에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貞節이라 諡號를 내렸다

雉 岳 山 題 名 錄 序
(치 악 산 제 명 록 서 )
元公觀瀾首之次者 趙公 漁溪 次者 李公 桃村, 而姓名之
(원공관란수지차자 조공 어계 차자 이공 도촌, 이성명지)
下各以別號標之下方題以景泰 年三月旣望立石云,而年上缺
(하각이별호표지 하방제이경태 연삼월기망입석운, 이년상결)
一字訥翁李公光庭之 定以爲六臣就死 之際末知何所考也,
(일자눌옹이공광정지 정이위육신취사 지제지말하소고야,)
然以此爲據則七年丙子矣, 夫石之爲 物終古不其立者又挺然
(연이차위거칙칠년병자의, 부석지위 물종고불륵기입자우정연)
不伏三君子題名必於是不以 他人間之其亦有取於石歟雉卽
(불복삼군자제명필어시불이 타인간지기역유취어석여치즉)
石歟雉卽原州 鎭山而原固 元公所 居之鄕也, 方其携手登臨
(원주 진산이원고원공소 거지향야, 방기휴수등임)
籍草 鼎坐酉山逸詩可知中 流楚 辭可詠也, 撫其跡而 想其
(적초 정좌유산일시가지중 유초 사가영야, 무기적이 상기,)
心有不傷心 隕涕乎,噫自當時 觀之鐵 其券而金 櫃者 輝煌震
( 심유불상심 운체호희자당시 관지철 기권이금 궤자 휘황진)
耀 何山阿片 石而霜降水落百年論定人之麻?而咨嗟者在此而
(요 하산아편 석이상강수락 백년논정 인지마사이자차 자 재차이)
不在彼矣余按 端宗初年癸酉元公以 集賢殿直提學 謝病歸又
(불재피의의여안 단종초년계유원공이 집현전직제학 사병귀우)
四年而六臣死
(사년이육신사)
山 在 原 州 參 判 睦 萬 中 撰
(산 재 원 주 참 판 목 만 중 찬)

치악산에있는 제명록에는 원공이 맨처음이요 그 다음이 조려 어계공 그다음이 이수형 도촌공이다 성명아래에 각기별호를 표시하고 아래쪽에는 경태년에 치악산 입석에 쓰다라고 하였는데 년자위에 한자가 빠저있다 눌옹 이광정공은 육신이 죽게될 무렵이라고 단언하니 무엇을 상고하여 그렇게단정한것인지 알수없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한다면 이치악산 제명록은 경태7년병자가 된다. 대저 돌이라는 것은 오래가도 깍여지지 않고 흩어지지도않는것이며 그 서있는 모습이 우뚝하여 굽히지 않으니 세군자의 이름을 돌에 새긴것도 이때문 이리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사이에 넣지않은 것 역시 돌에 연유하여 취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치악산은 바로 원주고을의 진산이요 원주는 원래 원공이 살던 지방이다. 옛날 세군자가 생존시에 손을 잡고 올라가서 풀을 자리삼아 둘러앉으면 서산의 남긴 시를 서로 화답 할수 있었을 것이고 또 중류의 초사를 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자취를 어루만지며 세군자의 심정을 헤아려 생각한다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아아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공훈을 철권에 적어 금으로 궤를만들어 직할만큼 휘황하게 빛나는 것이어늘어찌산모퉁이의 한조각 돌에 비길것이랴. 그러나 서리내리고 비떨어지는 동안 백년이 지난후에 옳은 의논이 결정되니 사람들이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탄하는 것은 여기에 있고 딴데 있는것이아니다. 내가 삼가 살펴 보건데 단종 초에 원공이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다가 병을 구실삼아 사면하고 돌아갔으며 또 4년만에 육신이 죽은 것이다.참판 목만중 지음

邀 仙 亭 (요선정)

題名錄(제명록)

  • 요선정은 주천강 상류의 풍경이 아름다운 암벽위에 위치하고 있어 일명 邀仙岩(요선암)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 주변에는 큰바위에 마애불좌상이 부각되고, 1.4m의 작은 5層石塔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옛날 寺址(사지)였을것으로 추측된다.
  • 주변경치가 아름답고 강물이 맑아 옛부터 이곳에 살던 元, 李, 郭氏등 유지들의 창의 로 1945년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안내되었다.(규모는 정면 1칸 측면1칸 八作집이다.
  • 요선암을 풀어보면 邀; 맞이하다. 仙;신선, 고상한사람, 岩;큰바위 즉 고상한 사람을 맞이하여 큰 결심을 갖게한다는 뜻이된다.
  • 요선정 건물의 역사는 짧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곳은 과연 선비들이 은밀하게 모여 의논 할 만한곳이다. 그렇다면 서기 1456년 丙子 8월 元,趙, 李 등三公이 모여 節義 를 盟誓하고 남음이 있을 만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직선거리 3백여미터 떨어진곳에 題名錄이 있다.

[寧越郡 水周面 武陵3里]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1호)

觀 瀾 亭, 碑閣 (관란정,비각)

  • 端宗이 영월로 流配되시자 觀瀾公이 이곳으로 옮겨와 관란정을 마련하고 朝夕으로 정자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端宗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시던 곳이다.
  • 서기1,629년 己巳仁祖7년 松鶴洞 長谷里(思乃坪)에 정자를 건립하시고 觀瀾亭이라고 名하고 懸板을 賜額하셨다.
  • 忠臣은 不事二君이란 忠節로 淸浦에서 비참한 流配생왈을 하는 12세의 어린 임금 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던 忠情이 여러지방의 學者와 선비들의 주청에 의해 만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정신 만고에 기리 빛날 公의 위덕이다.
  • 충북 지방문화재지정1996년 6월 24일 제 92호

「所在;忠北 堤川市 松鶴面 長谷里(思乃坪;寧越郡西面新川1里)」 (소재;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

文學詩碑 (문학시비)

-생육신관란원호선생 문학시비-
본시비는 한국문학비건립 동호회주관하에 종친회 후원과 원주시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서기 1997년6.14일 건립되었다.

「所在;原州市 明倫洞 雉岳藝術會館 庭園內」 (소재;원주시 명륜동 치악예술회관 정원내)

“ 간밤에 우던여울 슬피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보내도다 저물이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울어 보내도다
-청구영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