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공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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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

  • 貞簡公은 송림(松林)(현재 원주시 개운동)에서 4男1女중 次男으로 出生하고 幼年時節 을 이곳에서 成長하고 學業에 정진하여 15歲에 道學君子 란 稱號를 받았다.
  • 公은 幼年時節 기품과 도량이 자상하고 밝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옛것을 중하게 여겨 학문과 명망은 동료 친구들간에서도 추종 되었다.
  • 公은 28歲가 되는 서기1,423년 世宗4年 文科에 登科하시어 中央官職을 두루 轉職하며 政事에 參與하시고 文宗朝에 從 3品 集賢殿直提學 (집현전 직제학)에 致仕되었다.
  • 公은 人品이 우아하고 正中하며 말이 적고 氣槪와 마음가짐이 粉面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옛것을 사모하면서 끊임없이 努力 하였다.
  • 서기 1,452년 壬申 5月에 文宗이 昇遐하시니 수양대군(世祖)이 端宗을 輔弼 하는 金宗瑞 (김종서),皇甫仁(황보인)등을 죽이고, 이것을 國家의 患難을 진정시킨 일이라하고 정인지 등36명을 靖難功臣으로 推戴(추대)하니,

歎世詞 (탄세사)

이 탄세사는 公께서 서기 1,452년-1,453년 集賢殿에 근무 할때 문학과 덕망이 높이 알려져 있었는데 端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8명의 王子가 强盛 하여 인심이 불안하여 지니 이 세상을 탄식하는 시를 지으시고 낙향하시게 되었다.

公은 이듬해인 서기 1,453년 5월 癸酉년에 세상일을 근심하고 즐거운 일없이 괴로워하였으며 어두운 때에는 艱難하게 지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드디어 病을 구실로 官職을 辭退 하고 原州로 落鄕하였다.

단종안위기원

雉岳山 아래 松林에 흙을 모아 집을 지으시고 낮이면 항상 높은 산봉(山峰)에 오르시어 단종대왕을 추모(追慕)하는 마음으로 서쪽하늘을 바라보시고 밤이면 하늘을 우러러 端宗大王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祈願)하시니 하늘도 감동하심에 매일같이 公께서 계시는 고을에 안개가 걷히지 아니함으로 동명(同名)이 무항동(霧巷洞)이라 불리었으나, 오늘날에는 개운동으로 호칭되고 있고 오르시던 산봉우리를 망왕봉(望王峰) 이라 부르던 것이 현재와서는 하늘을 만질듯하다하여 천마봉(天摩峰)이라 불리우고 있다.

망왕봉(望王峰)

소재:원주시 단구동 (망왕봉은 원주시 단구동에 소재하고 있다 ; 公의 생가로부터약 1000m)

월계도 작성

  • 貞簡公께서는 서기1,453년 5月 落鄕時 抱川縣監 權琛과함께 落鄕하셨는데, 抱川公 은 橫城屯屯里에 居住하니 청소년 시절 학업에 정진하며 늘 친하게 交誼하였는데 서기 1,456年 6月에서야 抱川公과 함께 硏究하여 月計圖(월계도)를 完成 하게 되었다
  • 월계도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달이 뜨는 위치를 해마다 보면서 점검하여 그해 풍년,흉 년,가뭄 여부를 판단 농민들로 하여금 정월 대보름 달의 뜨는 위치를 보고 한해 농사를 예견하게 하였는데, 청소년 시절 학업에 정진하면서 농민들을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은 이때서야 하게된 것이다.

단종유배길

  • 수양대군(端宗의 叔父)의 陰謀로 서기1.455년 을해(乙亥) 윤6월(閏六月)에 王위에 오르 니 端宗은 동년 7월 28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여 江原道 寧越 西江 청령 포(淸浦)로 流配되시게 되었는데,
  • 서기 1,456년 병자(丙子) 6월7일 사육신(死六臣:成三問,朴彭年,兪應孚,李塏,河緯地,柳誠源) 이 참형(斬刑)을 당하고 단종이 유배되니,
  • 貞簡公 觀瀾 께서는 端宗大王의 유배길을 따르다 寧越 酒泉 샘터에 이르러 잠시 休息 을 취하였는데 觀瀾公께서 이곳에서 잠시 端宗 魯山君을 만나뵈올 수 있었는데 한 노파가 샘물을 떠다 받쳤다고 한다.
  • 端宗이 그곳을 떠나시니 샘물이 없었졌다고 傳해오고 있으며 오늘날 자연석에 "쉼터" 라고 새긴 表石과 노파동상을 영월군에서 세워놓았다.

  • 公께서 계속 端宗의 자취를 따라 寧越 西江 淸浦로 달려가셨으나 도강(渡江)할 배편이 없을뿐만 아니라 國法이 지엄(至嚴)하여 접촉이 불가능 한지라 하늘을 울어러 탄식(仰天 嘆息:앙천탄식)하였다.

[소재지;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리]
(이때 난데 없는 호랑이(虎)가 나타나 公을 도강케 하였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단종의 만수무강기원

公은 단종(端宗)께 가까이 갈수 없어 서강의 맑은 물이 구비쳐 흘러가고 강옆은 층암(層岩)과 절벽(絶壁)이 솟아 있고 지대가 높아 멀리 淸浦를 바라볼 수 있는 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사내평(思乃坪)이라는 곳에 돌을 모아 대(臺)를 만드시고 날마다 대에 올라 단종이 계신 청령포를 바라보고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단종위 만수무강을 기원하셨다.

소재지: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사내평)

  • 단종를 사모하는 시을 지으시니 이는 觀瀾公의 충절(忠節)의 시이며, (청구영언에서)
    • 간밤에 우던여울 슬피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任)이 울어보내도다
      물이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울어 보내도다”

      사모친 원한의 장강토목 베노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와서 우수수 분명 날니라
      이곳은 귀양온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청구영언에서
    때때로 주변에 있는 채소와 과실을 따서 글월과 함께 표주박에 담아 강물에 띄우면 약30리(三十里) 떨어진 淸浦의 기슭까지 흘러가면 단종께서 거두시어 보신후 다시 강물에 띄우면 급류(急流)를 타고 가슬러 올라와서 그 표주박을 觀瀾公이 받아보곤 하였다는 애사(哀史)에 전설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 公은 이곳에 나무로 亭子를 짓고 이름을 觀瀾이라 하였으니 이때 호를 觀瀾이라고 지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은 端宗을 위하여 가까이서 모시려는 생각에서였다. 날마다 정자에 올라가 端宗이 계신 곳을 우러러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고 앉거나 눕거나 반드시 동쪽 端宗이 계신 곳을 向하였다.
  • 날마다 부인과 채소 밭에 손수 물을 주고 김매어 가꾸어서 빈박통에 담아서 강물에 띄워 淸浦로 보내어 御饌으로 올렸으며 반찬을 드리는 그릇은 그 모양이 북과 같이 생겼는데 접으면 궤()와 같이 되고 펴면 걸상과 같이 되었으며 밤이 깊으면 엎드려 드리기도 하면서 이와 같이 항상 찬거리를 공급하는 것을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빠지지 않았다.
    • (관란유허비문내용발췌)
      어느날 -
      이웃에 한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날마다 남의 빨래를 하느라 강가에 나갔는데 언제나 선생이 먼저 정자에 나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공을찾아와 뵙고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이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아니하고 열녀는 두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내가 여기에 온 것은 우리 옛임금을 위해서이다."하였다. 그 여인도 울며 말하기를 "제가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데 지내기가 어려워서 얼마 안가서 다른사람에게 시집가려 하였는데 이제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미천한 여자 이긴 하지만 마음이 悚懼 스럽습니다."하고 종신토록 재가 하지 않았다한다.
  • 公은 端宗의 기거를 알아보려 하거나 또는 衣服과 식찬을 들이고자 할 때에는 먼저 낙엽에 글을 써서 빈박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서 사람을 江上 어느 곳에서 기다리게 약속하고는 몸소 가서 敬虔하게 바치고 또 문안도 드렸다. 恒常 婦人과 함께 채소밭에 물을 주고 김매어 농사 지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생활에 보태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端宗께 進獻 하기 위해서였다.

    遺:척유(家乘에서발췌)

제명록

서기 1456년 丙子 觀瀾公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漁溪 趙旅, 桃村,李秀亨 道義誼 親交가 있었으며 나라의 변혁을 당하여 살아 있는 이상 목 숨을 버려야할 의리는 없고 죽으려하여도 죽어야할 책임이 없으므로 방황하며 슬퍼하다가 때로는 찾아서 서로만나 酒泉 土室 邀仙亭(요선정)에 올라 세분의 선생이 손을 맞잡고 함께 節槪를 지킬 것을 約束하고 石壁 에 글씨를 써서 그 節槪를 盟誓하니 提名錄이라 한다.

[2000.11.23 삼성(원호,조려,이수형) 의 후손이 후원하고 제명록 아래 도로변에 영월 군수가 건립하였다]
(소재:영월군 수주명 무릉3리)

  • 邀仙亭(요선정)
    • 서기 1727년 영조3년에 餘窩(여와) 目萬中(목만중) 이 참판 시절 치악산 題名錄 書를 서술하였다
      현재의 제명록은 1987년 도로확장공사로 제명록이 파괴되는 것을 안타깝게여겨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三公 門中의 후원으로 寧越忠節顯彰會 주관하에 復元 된 것이다

단종의 승하 복상 3년

  • 端宗이 서기 1,457년 세조 3년 정축(丁丑) 10월 24일 비참(悲慘)하게 최후를 絞殺로 마치시니 이때 영월고을은 뇌성과 바람의 변이 있었고 검은 안개가 일어나 하늘의 경계도 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피가 흘러 붉은 옥이 되어 물위에 떠오르니 신하로서는 차마 말할수 없는 일이요 이 무슨 천변이었던가. 觀瀾公 께서는 땅을 두드리며 앙천통곡(仰天痛哭)하였다.
  • 영월군 수주면 백덕산(白德山) 아래 흙을 모아 집을 지으시고 공은禍가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홀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3년(서기1457-1459)의 상기(喪期)을 마쳤다.

원생몽유록

  • 公께서 3年을喪을 마칠 무렵 서기1,459년 9월 어느날 "夢遊錄"을 지어서 그의 感懷를 서술하였으니 觀瀾公의 精忠은 日.月과 같이 빛나고 大義는 가을 하늘보다 더 높았으니 이 충절을 누가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그곳 지명이 현재까지 토실(土室)이라 불려오고 있다.

두문불출은거생활

  • 公은 서기 1,459년 己卯 10月 服喪 3年을 마치고 原州 松林으로 돌아가 송림에서 이름을 霧巷이라 짓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말았다.
  • 觀瀾公께서 송림상록무항동(松林上麓霧巷洞)에다 흙을 모아 집을 지으시고 좌와필동(坐 臥必東):(앉을때나 누울때나 반드시 동쪽 즉 장릉(莊陵)이 있는곳) 하시고 문밖 출입을 금하시면서 친구도 만나지 아니하셨다.

어느날 조카 문정공(文靖公)께서 慶尙 監事가 되어 찾아 뵙기를 懇請하였으나 끝내 상면치 않으셨다 문정공 효연(孝然)이 뵈온지가 오래이오니 잡시 배알만 하고 가겠다고 간청했으나 관란 께서는 정보고 싶거든 문밖에 병풍을 치고 절하고 가거라 네 목소리만 들어도 본것이나 다름없다 조카 효연은 병풍을 치고 절하고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작은 아버지를 못만났던 이야기를 들은 세조도 감동해서 호조참의 자리를 주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으셨다

공의 절개와 유언

  • 觀瀾公께서는 차남 효겸(孝兼)의 삼남 貞愍公 숙강(叔康)이 世祖조정(朝庭)에서 벼슬하시어 世祖를 수행하고 금강산(金剛山)을 가시다가 世祖가 석불(石佛)을 보시고 절을 하시매 왕(王)이 견석불이배(見石佛而拜) 즉 돌부처를 보시고 절을하다)라고 쓰시니 世祖가 그것을 보고 그말을 지워버리라고 (삭지:削之)하니 왕이 우견삭지(王而 又見削之) 즉 왕이 지워버리라 하시니라고 또 쓰니 세조가 대노(大怒)하고 저의 조부(관란) 모양 곧기만 하다 하시면서 즉석에서 벼루를 들어 치니 참찰(慘刹)을 당하였다.
  • 이소식을 들으신 觀瀾公께서는 비분강개(悲憤慷慨: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가는 세태(世態)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 함을 참지 못하시고 "나의 자손은 글 읽어 이조(李朝)에 벼슬하지말라”하시고 저술(著述)과 기록(記錄)한 서적을 모두 불태우시고 남송촌의 자기 거처가 알려지자 다시 영월군 주천 토실로 들어가 여생을 마치니 향년(享年)67세로 서기 1,463년 世祖9年 10월3일 이었다. " 나의 자손은 송림(松林)과 남송(南松)을 뜨지 말고 살라”하신 유언(遺言)이 계시므로 아직까지도 남송이 자손의 고향이 되고 있다.